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아이리시맨(The Irishman)》은 단순한 갱스터 영화 그 이상이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이 3시간 반짜리 대서사는, 미국 현대사의 이면을 담은 범죄의 초상인 동시에, 노년에 접어든 남자의 후회와 고독을 담은 철학적 고백에 가깝다.
동일한 장르의 대명사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시리즈와 비교해 볼 때, 《아이리시맨》은 ‘권력과 혈통’의 미학이 아닌, ‘시간과 상실’의 비극에 집중한다. 이 글에서는 두 영화의 내러티브, 인물묘사, 미장센의 차이를 중심으로 《아이리시맨》이 어떤 방식으로 갱스터 장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는지를 분석한다.
《대부》의 영광 vs 《아이리시맨》의 쓸쓸한 고백
《대부》 시리즈는 갱스터 장르의 정점이다. 권력의 세습, 명예, 가문이라는 테마 속에서 마이클 콜레오네의 몰락을 서사화하며, 무게감 있는 오페라 같은 연출과 상징으로 가득하다. 반면 《아이리시맨》은 영광이 사라진 뒤, 남겨진 이의 침묵에 집중한다.
주인공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 니로)은 조직의 살인청부업자이자 노동조합 인물 지미 호파와의 복잡한 인연을 통해 범죄 세계의 중심에 선다. 하지만 그는 마이클처럼 중심이 되는 권력자는 아니다. 그는 철저한 수행자, 누군가의 명령을 묵묵히 따르는 병사다.
《대부》가 내부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가문의 이야기라면, 《아이리시맨》은 권력의 끝에서 버림받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다. 마지막 장면에서 프랭크가 요양원 침대 위에서 “문을 조금만 열어둬”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의 인생이 외면과 단절로 끝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게감 있는 캐릭터와 실제 노화의 연기
《아이리시맨》은 실제 노배우들의 시간 자체를 스토리에 활용한 작품이다.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라는 이름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는 이 캐스팅은, 단순한 향수 자극을 넘어서 영화 자체에 깊이를 부여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배우들이 디지털 디에이징(노화 제거) 기술을 통해 청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연기한다는 점이다. 이는 다소 어색하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같은 얼굴이 늙어가는 것’이 아닌, 실제로 나이든 이들이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듯한 구성을 의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대부》에서는 시대에 따라 다른 배우들이 역할을 맡거나, 분명한 세대 구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마이클 콜레오네는 한 배우(알 파치노)가 맡았지만, 청년기 브리토, 중년기 마이클, 노년기의 모습은 다른 연출적 톤을 통해 전개되었다.
《아이리시맨》은 그 톤을 하나로 통일한 채, 시간의 축적이 얼마나 인간을 고독하게 만드는지를 얼굴에 새겨넣는다. 알 파치노가 연기한 지미 호파는 폭발적이고 강한 신념을 지닌 인물이지만, 결국 시대에 밀려난다.
《대부》의 인물들이 신화로 남았다면, 《아이리시맨》의 인물들은 망각과 후회 속에 사라진다.
미장센과 리듬, 웅장함과 정적 사이
《대부》는 극적인 조명과 고전적인 음악, 느릿한 카메라 무빙과 함께 고전 명화 같은 시청각적 완성도를 자랑한다. 사운드트랙 하나만 들어도 그 상징성이 압도적이다. 반면 《아이리시맨》은 그 어떤 상징도 최소화한 현실주의적 연출을 택했다.
스코세이지는 장면마다 배경음악을 억제하고, 인물의 숨소리, 방 안의 침묵, 자동차 엔진 소리 같은 일상적 사운드를 강조함으로써 현실감을 극대화한다. 이는 영화 전체의 리듬을 느리게 만들지만, 바로 그 느림이 삶의 무게와 노년의 정서를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대부》가 하나의 전설처럼 화려하게 구성되었다면, 《아이리시맨》은 화려함 없는 감정의 진실만을 드러낸다. 이는 관객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 이 영화의 진정성이다.
'조직'의 낭만이 사라지고 난 뒤
《대부》는 범죄조직이지만 마치 ‘비즈니스’처럼 운영되는 권위와 질서를 묘사했다. 하지만 《아이리시맨》에는 그런 조직적 낭만이 없다.
조직은 무정하며, 아무리 충성을 다해도 보호해주지 않는다. 프랭크는 가족에게도 외면받고, 친구 지미 호파를 직접 죽이며, 그 어떤 영광도 얻지 못한 채 삶의 끝을 맞이한다.
영화는 이러한 비극을 ‘감정 없는 화법’으로 보여준다. 프랭크가 저지른 살인 행위들은 감정 없이 나열되며, 그의 과거 회상은 자기합리화와 무감정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독백처럼 다가온다.
《대부》가 권력과 책임의 무게를 이야기했다면, 《아이리시맨》은 시간이 모든 것을 지운 후 남겨지는 공허를 이야기한다.
마무리
《아이리시맨》은 갱스터 영화의 전통적인 틀을 해체하며, 영화 속 범죄자가 아닌 인간 프랭크 시런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조명한 작품이다.
《대부》가 권력의 서사를 중심으로 웅장하게 구성되었다면, 《아이리시맨》은 침묵과 노화, 고독과 후회로 점철된 정적인 걸작이다.
두 작품 모두 명작이지만, 그 방향성과 감정의 결은 완전히 다르다.
만약 당신이 ‘범죄 영화’라는 장르에서 인간적인 깊이와 철학을 느껴보고 싶다면, 《아이리시맨》은 반드시 감상해야 할 영화다.